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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9-16 15:39
12_09_09 연중 제23주일(나해) 교중미사 신부님 강론말씀
 글쓴이 : 신정동성당
조회 : 1,044  
 연중 제23주일(나해)
 2012년 9월 9일(신정동, 박동호신부)
마르코 7,31-37
 
구약성경은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해방시키신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신약성경은 모든 억압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죄악과 죽음의 굴레에서
인류를 해방시키신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자시라는 것,
모든 억압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해방자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든 해방이든, 이는 억압을 전제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억압의 상태가 엄연히 실재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 억압의 상태에서
인류를 구원과 해방의 길로 인도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많은 신앙인이 해방과 구원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심리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나와 내 가족이 축복을 받아 행복해질 것이라 기대하며,
신앙생활을 하면 마음으로나마 행복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문제,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는 종교가 간여할 바가 아니라고,
신앙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받아들이도록 가르칩니다.
이 같은 개인적이며 기복적인 신앙태도는 심각한 오류이며 대단한 착각입니다.
 
경제든, 정치든, 사회든, 그것들은 개인으로서든 공동체로서든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조건, 곧 환경입니다.
이 환경이 건강하지 않으면,
그 속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 절대로 건강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건강한 폐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거나,
부패한 음식을 섭취하면서 탈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오시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처지의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은
신문이나 텔레비전 혹은 인터넷 같은 언론 매체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언론 매체가 전하는 것만
보고 듣고 생각하고 해석하고 판단한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언론 매체가 세상의 진실을 우리에게 전해준다면,
우리는 눈은 진실을 보고, 우리의 귀는 진실을 듣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신문이나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듣고 본 것이
진실을 은폐하고 그럴듯하게 포장된 거짓이거나 조작 왜곡된 것이라면,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 것이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 셈입니다.
혹시 어느 특정 집단이 자기들의 탐욕이나 권력 혹은 사사로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언론매체를 교묘하게 조종 악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조심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와 같은 일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문에 보도된 것, 뉴스로 방영된 것이 조작되었거나 거짓이었음이 드러나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사례를 찾아보라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때 그랬고, 북한의 금강산 댐 위협 때가 그랬고,
IMF 사태 직전에 그랬고, 몇 해 전 미국 발 금융위기 때도 그랬습니다.
언론매체는 태연하게 거짓을 전했고, 수많은 사람이 그 거짓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였고,
또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오늘 이 시각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는 오늘날 우리의 처지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열려라!”하십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하는 어둠과 죽음의 세력에서 사람을 해방시켜,
진실을 보고 들으며 말하도록 해주신 것입니다.덧붙여서 또 다른 형태의 억압과 비구원이 있습니다. 차별이 그것입니다.
2독서의 야고보서가 밝힌 것처럼,
우리 사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분명히 두 개의 전혀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의 세계와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가 있습니다.
두 세계 사이에는 높고 견고한 벽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전혀 다른 두 세계입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사는 곳도, 배우는 것도, 하는 일도 전혀 다릅니다.
부유한 세계로 넘어가려고 수많은 사람이 애를 쓰지만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거꾸로 가난한 세계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은 식은 죽 먹기로 쉽습니다.
 
그보다 더 슬픈 현실은 우리가 그 견고한 벽을 허물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오히려 더 견고하고 높게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든 경제든 교육이든 사회든 종교든 모든 분야에서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을 독차지하고,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은 남은 것을 두고
목숨 내놓고 싸우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 믿거나 체념합니다.
누군가가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게끔,
혹은 체념하게끔 치밀하게 어려서부터 교육하여 세뇌시킨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에게
내 운명과 이 세상을 송두리째 맡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눈을 뜨고, 귀를 열어야겠습니다.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들이 교묘하게 은폐한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진리에 길, 구원의 길, 해방의 길을 쫓아야 하겠습니다.

최건호 야고보 12-09-16 22:43
 
스쳐 지나 만 가는 시선.
무 관심.
아니면
발등에 떨어진 불에 동화(同化) ?.

분명 남의 일 만은 아님니다.

진실마저 외면하는 자세가 되여서는 아니 되겠읍니다.

심심(心深)한 성찰(省察)을 합니다.

실재(實在)한. 악 순환의 격차를 최소한 좁히는 일에도

우리 신앙인의 슬기로운 지성(智誠)이 필두(必頭) 되여야 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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