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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8-23 12:45
12_08_19 연중 제20주일(나해) 교중미사 신부님 강론말씀
 글쓴이 : 신정동성당
조회 : 1,277  
연중 제20주일(나해)
2012년 8월 19일(신정동, 박동호신부)
요한 6,51-58
 
사람을 비롯해서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서로를 죽임’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살림’으로써 존재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살리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의 일부를 덜어냅니다.풀한 포기도 씨앗을 떨어
뜨려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고, 또 번성합니다.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밀림을 관찰한 학자들의 연구가 이를 증언 합니다.
 
동물도 번식하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새끼를 먹이기 위해 수 십리 사냥 길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최상의 포식자라도 무작정 사냥하고 무작정 먹어치우지 않습니다.
포식자 동물 사이에 먹이를 놓고 경쟁이 벌어지지만, 그 경쟁이란 것도 사실은 전체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는 경쟁일 뿐이지, 파괴하는 경쟁이 아닙니다.
그렇게 전체질서와 조화를 파괴하였다가는 조만간 자기들이 먹을 먹잇감이 사라지게 되고,
그리되면 아무리 최상의 포식자라도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압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고, 가정이 마을을 이루고, 마을이 민족을 형성하고
인류 공동체를 이루며 수십만 년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서로를 살림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을 의미하는 한자어 사람(人)자도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수십만 년의 인류 역사를 놓고 보면 약 300년 정도는 사실 점 하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에 불과합니다.
그 300 여년 사이에 사람들 마음에 ‘서로를 살림’이라는 (사회적) 유전인자가 ‘서로를 죽임’이라는
유전인자로 변형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오늘날 우리 사람 사는 세상은 무서워졌습니다.
‘적자생존’(살아도 될 사람과 살 가치도 없는 사람을 구별한다는 살벌함이 숨어있는 표현입니다.)
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인구에 회자되고, ‘
만민의 만민에 대한 투쟁’(남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끔찍함을 그럴듯하게 표현한 것입니다)이란 말은 마치 격언처럼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살벌함과 끔찍함이 말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자유로운 경쟁’이란 이념으로 우리 사람과 사회의 삶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유’란 얼마나 달콤한 표현입니까? 또 ‘경쟁’이란 얼마나 역동적인 표현입니까?
그러나 이 자유와 경쟁은 살벌함과 끔찍함을 숨긴 가면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 서로를 살리기 위해 땀을 흘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모습,
더 나아가 양보하고 포기하며 희생하는 삶은 우리가 들은 2독서의 표현대로라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의 몫이 되었고,
 
1독서의 표현대로라면 ‘지각없는 이’의 철없는 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듣기 좋은 그럴듯한 말씀으로만 머물러 있을 뿐, 우리의 삶과 사회생활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자기 살을 내놓고, 자기 피를 흘리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대신에 지혜롭고 똑똑하며 유능한 사람이란, 적자 생존하는 사람이며, 투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이며, 경쟁에서 앞선 사람을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과연 ‘서로를 살리는 유전자’는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고, 오로지 ‘서로를 죽이는 유전자’만 남은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발전’ 혹은 ‘번영’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아직 모릅니다. (낙관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섣불리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수십만 년 인류 역사 가운데, ‘서로를 죽이는’ 그 몹쓸 (사회적) 유전자가 출현하여 사람과 세상을 지배한 역사는 고작 300년 남짓할 뿐이며, 그 끝을 아직 우리는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이데올로기가 과연 함께 사는 문명의 세상을 가져올 것인지,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 우리의 후손이 더욱 치열하게 서로를 죽여야만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험악한 세상으로 치달을지,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다만, 식물의 세계, 동물의 세계, 자연의 세계가 보여주는 교훈과 지혜는 ‘서로를 살림으로써’
모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고쳐보면 어떨까요? "당신을 살리기 위해 제 살을 덜어드리겠습니다.
당신에게 생명을 건네기 위해 제 피를 흘리겠습니다. 제살은 당신의 양식이며, 제 피는 당신의 음료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당신 안에 머무르고, 당신과 저 함께 귀한 생명을 나눕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투쟁과 죽음을 퍼뜨리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자신을 빵으로 내어놓아, 곧 희생함으로써 서로를 살리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아멘.
 

최건호 야고보 12-08-23 22:48
 
천리(天理)를 습득하여 살아보리라 성당(聖堂)에 모여와서 귀를 귀울립니다.
말씀인즉.
진실한 자세로 공생 함이. 바른 귀결 이라고. 사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