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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4-16 13:04
14_04_13 주님수난 성지주일 신부님 강론말씀
 글쓴이 : 신정동성당
조회 : 955  

주님수난 성지주일 (가해, 박동호신부, 신정동 성당) 

                                                            2014년 4월 13일 

                                                  마태오 26,14-27,66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지냅니다. 이날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 과정에서 제자들이 보인 태도를 통해

‘신앙의 실패’, ‘교회 공동체의 실패’, 그리고 ‘사회의 실패’를 성찰합니다.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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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사제들에게 가서 물었다. “내가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수석사제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26,14-16)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26,33)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베드로만 그런 것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26,35)

 

그렇지만 정작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혀간 다음,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26,70)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다시 부인하였습니다.(26,72)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심지어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면서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2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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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베드로와 유다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한 몫을 했습니다.

유다는 ‘상품’처럼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외면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유다 같은 배반자를 비난할 수 있습니다.

비난에 그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들을 처단하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배반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 악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은 ‘선’의 편, 정의의 편에 서 있음을 드러내려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타인’과 어떤 집단을 물리쳐야 할 ‘악마’로 만들면,

이중의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악마를 배척하고 척결하는 일이니까 정당한 일, 당연한 일로 보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나 집단의 ‘악’을 감출 수 있는 효과도 있습니다.

 

수석사제들이 그렇게 집요하게 예수님을 ‘처단’하려했던 것은,

자신들의 ‘악’을 감추고, ‘정의의 사도’로 보이려 했던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마귀와 손을 잡은 사람으로 몰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하느님을 모독하는 악마로 만들어야

그를 처단할 명분을 세우고, 그분을 처단하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 ‘악마’를 제거하는 것, ‘정의로운 행동’, 하느님의 뜻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요한복음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이렇게 정당화합니다.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 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11,48-50)

 

그들은 ‘거룩한 곳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며 제법 ‘숭고한 뜻’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러분 곧 자기들에게 더 나은 것’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더 나은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자기들만 하느님 편이라는 것, 자기들만 거룩하다는 것, 자기들만 옳다는 것이겠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더 나은 것’은 로마 식민지배 상황에서

동족 유다인들을 핍박하고 억누름으로써,

로마로부터 받는 지위와 부와 권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룩한 곳’이라 한 곳을 예수님께서는 ‘강도들의 소굴’이라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강도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민족’이라 한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민족’을 염려한 것이 아니라,

로마로부터 받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빼앗길까 염려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대로 두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믿을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모두 예수님을 믿으려 했을까요? 적어도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하신 일’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은 그분께서 하신 일을

사람들에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자기들에게 더 나은 일만 일삼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은 ‘민족과 거룩한 곳’을 내세워 예수님을 제거하고,

자기들에게 ‘더 나은 일’ 곧 권력과 부와 명예를 지켰으니 성공한 셈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사회의 실패’ 곧 대다수 유다 시민의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 때 성경은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26,56)고 합니다.

이는 베드로나 유다 같은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도, 집단도, 사회도, 국가도,

그리고 교회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증명합니다.

 

한 사회가 그 안에서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을 외면한다면,

한 사회의 일부집단이 자기들에게 더 나은 것을 위해, 손쉽게

다른 수많은 이들을 값싸게 팔아넘길 수 있습니다.

 

짧은 근현대사에서 우리 역시 그런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이 땅의 부일 지도자들은 성공했고,

그래서 감투를 썼고, 땅을 받았으며,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 대가는 이천만 시민의 혹독한 고통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계속된 독재 권력집단은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삼천만 시민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IMF 때 소수의 기득권자들은 그 틈에 막대한 부를 쓸어 담으며 성공했습니다.

사천만 시민은 고통을 겪었고 지금도 그 고통은 계속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그리스도인, 교회는 그 때 무엇을 했는지,

‘자기보전’을 위해, ‘하느님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달아나버렸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석사제와 최고의회와 원로들 같은 못된 지도자들은

더 정교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자기들에게만 더 좋은 일’을

계속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자기들에게 더 나은 것’을 위해서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적 이익’과 ‘지배권력’을 취하고 지키려는 집단이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즘 시민을 위해 봉사해야 할 국가권력기관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걸림돌이 될 것 같으면, 누구나 다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권력 화된 언론은 이에 화답하여 중계 보도하고,

시민은 무비판적으로 동조하거나 침묵하는 현상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걱정이 단순한 기우가 아니라 사실이라면,

우리 사회가 ‘실패한 사회’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때 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게 됩니다.

 

주님 수난성지주일을 보내며,

언제나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사회의 실패’, ‘교회의 실패’,

무엇보다도 ‘신앙의 실패’라는 교훈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26,75)으며,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그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쳤습니다.”(27,3) 아멘.


요한 15-11-01 17:26
 
찬미예수님!
우리는 행복합니다 어떻게 이처럼 보배로운 강론을 받을수 있었는지 말이예요.
신부님 감사해요 깨우쳐 주셔서요.